삽질하다 알게 된 샵질
한동안 같은 자리에서 계속 넘어졌습니다. 방향을 바꿔봐도, 방법을 바꿔봐도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그게 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삽질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애써 뭔가를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밤을 새워 만든 기획안이 회의 시작 오분 만에 접히던 날, 몇 주를 들인 계획이 첫 단추부터 틀어졌다는 걸 알게 된 날, 그런 날마다 머릿속에서 같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삽질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괜찮다고 위로해줬지만, 정작 저 자신은 그 위로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간과 애정을 들인 만큼 결과가 없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걸 눈치챘습니다. 삽질을 한 번도 안 해본 일에서는 제가 뭘 모르는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삽질을 해본 일에서는 이상하게도 다음번에는 같은 구멍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실패라는 형태로 겪고 나서야 제가 어디가 허술한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머리로 아무리 점검해도 보이지 않던 틈이, 직접 넘어지고 나서야 선명해졌습니다. 처음 겪을 땐 그저 아프기만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아픔이 정확히 어디를 짚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잘 풀렸던 일들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비슷한 일에서 크게 넘어져본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 시도했던 일은 대부분 어설프게 끝났고, 그 어설픔이 남긴 흔적을 다음번에 그대로 고쳐 쓰면서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한 번에 잘된 일은 손에 꼽습니다. 대부분은 먼저 실패를 한 번 겪고 나서야 방향이 잡혔습니다.
삽질과 샵질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처음엔 그냥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을수록 이상하게 맞아떨어지는 데가 있었습니다. 음악에서 샵은 음을 반음 올리는 기호입니다. 원래 자리보다 한 칸 위로, 아주 조금 다듬어 올리는 표시입니다. 삽질이 그런 역할을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헛발질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사실은 저를 반음 올려놓는 과정이었습니다. 음 하나가 반음 올라간다고 곡 전체가 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반음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결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가만히 앉아서 반성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제 글이 장황하다는 걸 몰랐습니다. 누군가 몇 번이나 지적해줘도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직접 마감에 쫓겨 급하게 써낸 글이 형편없이 늘어진 걸 다시 읽었을 때, 그제서야 문제가 뭔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장을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어디서 힘을 빼야 하는지, 그 감각은 실패한 원고를 붙들고 씨름한 뒤에야 손에 잡혔습니다. 남이 아무리 정확하게 짚어줘도, 결국 제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만 진짜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지적을 받는 순간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을 듣는 것과 그걸 실제로 겪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말로 들은 지적은 금방 잊히지만, 몸으로 겪은 실패는 오래 남습니다. 실패의 기억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래가는 만큼 배움도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지적을 받으면 일부러라도 그 상황을 한 번 직접 겪어보려고 합니다. 겪어봐야 진짜 제 것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겪고 나면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 실패를 재수 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서둘러 잊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실패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길입니다. 앞의 길을 택하면 다음에도 비슷한 자리에서 또 넘어집니다. 뒤의 길을 택하면 적어도 같은 구멍에는 두 번 빠지지 않습니다. 결과가 다른 이유는 능력 차이가 아니라 그 실패를 대하는 태도 차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겪어도,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다른 사람은 그 자리를 발판 삼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건 재능이 아니라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뭔가에 실패했을 때 예전만큼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번 삽질이 나에게 뭘 알려주려고 하는 걸까. 답이 바로 나오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질문을 던져두면, 며칠 뒤든 몇 달 뒤든 문득 답이 보이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이 오면 그 실패는 더 이상 낭비한 시간이 아니라 저를 한 칸 올려놓은 계단이 됩니다. 처음에는 이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실패 직후에는 그저 화가 나고 지치기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질문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실패한 순간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면 삽질이 가장 무섭게 느껴졌던 순간은, 그 삽질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끝이 보이는 고생은 오히려 견딜 만합니다. 문제는 지금 하고 있는 이 헤맴이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인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 순간입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오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그 판단은 지나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창 헤매는 중에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답이 안 보인다고 해서 그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압니다.
또 하나 알게 된 건, 삽질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되는 삽질과, 매번 조금씩 다른 이유로 넘어지는 삽질은 다릅니다. 전자는 뭔가 근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후자는 오히려 여러 각도에서 하나의 문제를 두드려보고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실패를 무조건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지 않게 됐습니다. 어떤 실패는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는 신호였고, 어떤 실패는 계속 가도 된다는 신호였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패담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특별히 실패를 좋아해서가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은 실패를 마주했을 때 거기서 등을 돌리지 않고 한 번 더 들여다본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삽질이 삽질로만 끝나지 않게, 그 안에서 샵질의 순간을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화려한 결과만 보면 그 과정에 있었던 무수한 삽질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만든 진짜 재료는 대부분 보이지 않는 삽질의 시간들이었을 거라고,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어딘가에서 계속 넘어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시간을 너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넘어진 자리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게 아니라, 다음엔 그 자리를 피해갈 감각이 조금씩 쌓이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소용 없어 보이는 그 시간이, 나중에 돌아보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실패를 원망하는 대신 그 존재에게 작게라도 고맙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삽질이 아니라 샵질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삽질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예전보다 조금 너그러워졌습니다. 이 시간이 언젠가 반음 올라간 음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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